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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걸음이 빠른 사람이 사랑을 놓친다.
팔자에도 없던 당일치기 여행 아닌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간장게장이 든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있어서 그냥 자리에 안 앉고 반대편 문 앞에 박스를 둔 채 서있었다. 내가 내리는 역만 열리는 문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있는데 왼편에 내 시선을 끄는 옷을 입은 여성 분이 서계셨다. 초록색 치마에 나이키 신발이었던가. 그냥 워낙 색이 특이해 힐끔 봤는데 세상에 잠깐에다 안경도 안 써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이었다. 계속 신경이 쓰여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뭐라도 계속 읽으려고 애쓰면서 집중을 다른 데로 돌렸다.
자리가 한 개 나서 그 분이 가서 앉았다. 다행이다 이제 안 볼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내가 서 있는 바로 옆 끄트머리 자리가 나서 앉았다. 그러고 나니, 어쩌다보니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 분은 희한하게도 핸드폰을 보거나 하지 않고 턱을 괸 채 잠도 자지 않고 내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가만히 있었다. 눈치가 너무 보여 보고 있던 만화를 끄고 음악만 들었다.
내릴 역이 다가오고, 혹여 우연히 같은 역에 내린다면 내가 따라내리는 것처럼 오해를 살까봐 열차가 멈추기 좀 전에 일어나서 미리 문 앞에 섰다. 정말 우연하게도 그 분과 같은 역에서 내렸다. 슬슬 진짜 오해를 받을 것 같아서 나는 걸음을 빠르게 옮겨서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출구에 도착해 에스컬레이터에 타고, 간장게장을 내려놓고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그 분이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다시 앞을 봤다. 역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버스가 왔고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으나 부지런히 뛰어 버스를 탔다. 공교롭게도 그 분은 버스까진 같이 타지 않으셨다.
그러고 집에 오는 길에 담배를 피며 생각했다. 첫째. 대체 무슨 오해를 받는다고 나는 혼자 그렇게 설쳐댔나. 둘째. 아니 뭐 다짜고짜 첫 눈에 반했다고 고백을 할 것도 아니고 혼자 러브 스토리를 왜 이렇게 쓰고 있나. 셋째. 근데 만약 내가 뜬금없이 말이라도 걸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돌고돌아 이런 부끄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이 얘기만을 위한 건 당연히 아니다. 너무 하찮은 망상에 깊이 절여진 금사빠의 하루로 치부해도 되는 짧디짧은 한 장면이지만,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아니어도 내가 살아오며 이런 식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냥 커다란 비유에 대한 이야기다. 난 실제로 걷는 속도도 굉장히 빠르고, 마음이 걷는 속도와 생각이 걷는 속도 역시 지나치게 빠르다. 그리고 겁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항상 엉뚱한 곳에 먼저 당도한 다음 아무도 없는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곤 했다. 따라오는 줄 알았으나 따라오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줄 알았으나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사람들과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내 쪽에서건, 그 쪽에서건.
오늘 같이 일하는 나보다 한참 선배인 분에게 남에게 살갑게 대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이 자기한테 잘 하라는 말이 아니라, 누가봐도 어색해하고 쭈뼛대고 허둥대는 내 모습에 진심으로 말씀해주시는 것 같아 하루종일 그 생각만 가득했다. 험난한 사회 생활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마저 이런 식이면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항상 내가 내리는 역만 열리는 문의 방향이 다르다. 안 그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