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 상태를 사랑이나 그런 비슷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마저 멈추겠다. 몇 개의 키워드들로 정리가 가능할 것 같다. 자조를 조금 섞자면 한심함이나 멍청함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답답함. 또는 절대 지치지 않는 바보짓. 이런 거 할 땐 박지성 부럽지 않게 체력도 좋다. 동시에 자해. 그런데 정말 아픈 구석까지 나를 해할 수는 없는 최소한의 양심이라 적고, 다시 말해선 도망치는 법만 배운 태도. 상상에 의해 강해져서 부릴 수 있는 기이한 허세. 그러니까 모든 걸 다 줄 수 있을 것만 같다가도 막상 그러려고 하면 지레 잔뜩 집어먹는 겁.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 오지 않는 누군가를 우두커니 기다리는 일. 우두커니 하다 못 참겠으면 나가서 돌아다니면서 기다리는 일. 하지만 차마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다니지는 못 하는 일. 마주치면 대체 여기까지 왜 왔느냐는 말을 들을까 겁이 나서 지레 먼저 입을 다무는 일. 온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리다 지쳐 화를 내고 슬퍼하는 일. 내가 당신에게 딱히 필요없는 사람이란 걸 차마 확인하고 싶지 않아 숨는 일. 이 모든 멍청하고 한심하고,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지긋지긋해진 과정을, 너무도 쉽게 한 번에 동시에 해내면서 마음을 모조리 써버리는 일.
나는 취미를 나눌 사람이 이제 정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부질없게 세상에 외치고만 있다. 이거 나 혼자 하기 진짜 아까운 일이에요. 저는 뒤늦게 만화책도 엄청 많이 보고 있고요,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고 있고요, 요새는 락이랑 90년대 댄스곡, 유로댄스는 조금 제쳐두고 시티팝을 깊게 듣고 있고, 어제 나온 에픽하이 새 앨범은 지금 듣고 있어요. 축구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있는 날마다 챙겨보고요, 다음 주 월요일부턴 농구도 시작할 예정이예요. 틈날 때마다 서점을 둘러보고, 틈날 때마다 걸으려고 노력해요. 근데 이거 다 저 혼자 재밌고 싶어서 하는 일인가 하면 아닌 거 같아요. 취미는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뭐하러 살고 있는 건가요. 그러면 다들 뭐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요.
아직도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들 반, 언제고 소식을 듣고 싶은 친구들 반 해서 서른 명 남짓밖에 팔로우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더 팔로우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사실 그래서 조금은 무섭다. 나는 별안간 엄청난 겁쟁이가 된 채로 세상에 다시 던져졌고, 그러면서 자기 방어를 마치 영리하게 실속을 챙기는 일인 것처럼 스스로 위안삼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비어있는 거리의 풍경처럼, 비어있는 내 메신저와 SNS 창들. 비어있는 내 마음. 내가 지금 채울 수 있는 건 내 책장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뭔가를 사서 모으는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나보다.
"보자, 뭐라고 해야 하나... 코바루카와 걔 있지, 너 좋아하거든."
"...네?"
"전혀 못 알아챈 건 아닐 텐데?"
"......그게, 저..."
"사실은 있지, 아마 나랑 만나기 전부터 계속, 계속 그랬을 거야.
하지만 네가 맨날 내 얘기만 하고 그래서 자기 마음을 얼버무리기 위해 필사적이라고, 걔도."
"저, 그... 얼버무릴 수 있단 말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 진짜 좋아해. 그래도 말은 안 하지만. 걘 그런 애야.
착각은 안 했으면 하는데 걔가 키도를 좋아하는 것도 진짜야.
하지만, 여기서 '좋아한다' 라는 건
결코, 한 순간도 멈춰선 안 될 '좋아한다' 거든.
'좋아한다' 라고 계속 믿지 않으면 지속이 안 되는 '좋아한다'.
오해였다는 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다 이거야."
- 단편집 <이사> 수록 단편 '이사' #04 태양 중에서, 사무라 히로아키.
음. 너무 싸이월드스럽나.